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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역사와 해양문화. 유럽의 팽창과 첫 번째 식민제국들 1500-1650

요지 :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등에 의해 식민지가 건설되고 유럽이 세계제국을 건설해간 과정 & 오스만제국의 부상과 비잔틴제국 종말의 결과로 유럽에서 인도와 중국까지의 무역루트에 장애가 있게 되고 이로 인해 해로를 통해 이 지역들로 가려는 시도로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 유럽인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시대가 되었다.

유럽각국의 항로개척-포르투갈은 1487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에 도달했으며 1498년에는 바스크 다 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에 도착했다. 스페인은 크리스토프 콜럼버스가 1492년부터 서쪽으로 항해하여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아마존의 입구와 우루과이를 발견했고 1519-22년에는 페르디난트 마젤란의 주도 하에 에스파냐탐험대가 최초로 세계를 일주했고 필리핀을 발견했으며 이 때 실제로 세계가 둥글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이러한 항해들은 북동, 북서를 통해 인도와 중국에 도달하려는 시도로 확대되었다.

발견들 속의 주요한 네 가지 발달들-첫 번째, 세계의 유럽화가 진행되어 거대한 인구이동과 인종 혼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식민지화의 진행에 영향을 준 두 가지 요소는 날씨와 현지노동자의 공급이었다. 두 번째, 세계교역이 확대되고 교역기술이 신장되었다. 이는 새로운 생산품들(담배, 코코아, 감자)이 시장으로 들어오고 기존의 생산품들(어류, 모피, 커피, 설탕)이 훨씬 더 대량으로 구매 가능하게 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로부터 기인한다. 국제교역에서 중요한 요소는 거리였다. 거리가 멀수록 수송시간이 길어지고 본국으로부터 오고 가는 배의 빈도가 줄어들었다. 이는 상품들을 보관할 대형 창고의 등장으로 이어졌으며 거대한 자본지출과 신용의 확대를 요구했다. 대륙과의 교역이 시작되고 규모와 위험부담 증대라는 특성은 한 개인이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자본을 요구했고 이는 국가의 개입이나, 상인들의 연합인 공동출자회사의 형성으로 이어졌다.(동인도회사) 지불은 중세 후기와 마찬가지로 환어음으로 이루어졌으며 구매자와 판매자의 쌍방에만 적용되었다. 세 번째, 발트 해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유럽의 경제적 힘의 균형추가 기울었다. 중세 후기의 주도적인 상업 지대였던 이탈리아, 저지대국가들, 발트 해 연안의 국가들은 희망봉을 돌아 인도, 중국과 교역이 가능해지면서 독점권을 위협받게 된다. 이로 인해 세비야, 리스본,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브리스틀, 런던과 같은 항구들이 성장했다. 네 번째, 경제적 힘이 대서양으로 이동함에 따라 이 국가들의 정치적 힘도 증대되었다. 터키의 유럽진격을 막으려고 국력을 소비하던 중동부유럽과 달리 서유럽은 식민제국들의 형성과 이에 따른 세계의 분할을 겪는다. 또한 분쟁보다 제휴를 선택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교황 알렉산더6세의 중재로 토르데시아스조약을 체결한다. 기준선의 동쪽은 포르투갈에게, 서쪽은 스페인에게 할당되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 아프리카, 인도, 인도네시아군도, 마카오까지 식민지를 건설했고 스페인은 중부아메리카와 브라질을 제외한 남아메리카의 나머지 지역, 북아메리카의 서부와 남부의 대부분, 필리핀, 쿠바, 자메이카, 산토도밍고를 포함한 카리브 해의 섬들을 장악했다. 하지만 협정은 조약가맹국간의 경쟁을 막지 못했고 다른 서유럽국가들은 양 국가의 전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은 각각 북아메리카, 아시아등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신대륙발견 후의 스페인-신대륙을 발견한 후 첫 번째, 스페인 내부의 가톨릭왕국들은 이슬람세력들을 축출하기 위해 레콘키스타를 수행했다. 국토회복운동이라고도 하며 결국에는 이슬람세력을 축출하고 이베리아반도를 재정복하는 데에 성공한다. 두 번째, 강력한 왕국들이 출현했는데 1139년에 포르투갈이 왕국이 되었고 카스티야, 아라곤도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 1469년에는 아라곤의 페르디난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이 결혼하여 두 국가는 통합되었다. 1492년에는 잔존해있던 무어인들의 마지막 발판이었던 그라나다가 함락되었다. 스페인과 합스부르크왕가의 정략결혼을 통해 모든 권력과 영토를 물려받고 할아버지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뽑힌 카를5세는 독일의 충성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그 다음 유럽의 150년은 그 자신과 그의 후계자가 아메리카로부터 나오는 부를 이용하여 정치적 야심을 달성하려는 시도로 점철되었다. 독일 북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프로테스탄티즘이 부상했고 이들은 이전의 이교도들보다 훨씬 더 맹렬하게 유럽의 가톨릭통합을 분열시키려고 위협했다. 16세기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지만 적들이 너무 많았고 경제개발에 실패하면서 17세기 후반에는 이류 국가로 강등되었다. 이는 스페인이 1700년대가 되도록 통합된 국가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저지대국가들(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은 유럽에서 가장 산업적이며 경제적으로 번창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필립2세는 프로테스탄티즘이 득세하는 것에 반대하여 강화조약의 임무를 명목으로 저지대국가들로 군대를 파견했다. 남부(벨기에)는 점령되었고 신교를 근절했지만 안트베르펜과 같은 도시들이 약탈당해 지역경제에 큰 손실이 되었다. 북부(네덜란드)는 홀란드의 통솔 하에 연합 네덜란드를 구성하여 저항하였고 1684년에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이에 이어 필립2세는 영국 해협의 지배권을 바라고 출정했으나 영국해군과 악천후를 이기지 못하고 무적함대는 몰락했다. 이에 따라 경제력도 쇠퇴하게 되었고 스페인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네덜란드는 세계일류권력에 등극하게 된다.

네덜란드의 8가지 성공요인-첫 번째, 정치에 있어 무역을 천시했던 봉건귀족이 아닌 자원의 활용에 능숙한 기업가적 상인계급이 득세를 했다. 두 번째, 조선능력이 탁월했다. 세 번째, 암스테르담이 세계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네 번째, 숙련된 노동자들의 풍부한 공급(신교박해를 피해 넘어온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있었다. 다섯 번째,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생산품의 질을 낮추는 것이 아닌, 생산원가절감정책을 기초로 생산에 임했다. 이는 네덜란드가 유럽의 중개인이 되게 함으로서 상업적 번영을 가져왔다. 여섯 번째, 상업적 번영에 동반되어 인구의 식량공급에 필수적인 농업의 진보가 있었다. 일곱 번째, 적들의 기여가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부유했던 재정을 바탕으로 군비를 일상적으로 지출하며 1년 내내 상비군을 유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하지만 이후 영국과의 경쟁에서 밀려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