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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프로야구에 대해 알아보자

IT eoeo25 2022. 8. 18. 16:11

프로야구

1. 일본인과 프로야구プロ野球

일본은 야구의 나라다. 야구로 날이 밝고 야구로 날이 샌다. 스포츠 분야에서 한해의 시작을 알리는 톱뉴스도 야구고, 한해를 마감하는 톱뉴스 역시 야구다. 가판대의 스포츠신문은 예외 없이 프로야구를 톱기사로 다루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

는 일본인 자신들이 옛날부터 국기로 자랑해 오던 스모를 제치고 최고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순수 서양식 운동경기인 야구가 토양이 판이한 일본에 이식돼서 단단히 뿌리를 박고 크게 성장한 데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을 것인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일본에는 처음부터 프로야구가 튼튼하게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추어 야구가 꾸준히 인기를 유지해 줌으로써 우수선수가 많이 배출되고, 그 선수가 팬을 몰고 프로야구에 투신하면 프로야구 인기는 자연히 그만큼 더 올라가게 된다. 인기가 높아질수록 프로야구를 지망하는 우수선수가 더 많이 커 올라와서 프로의 전력을 보충하면서 인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이상적 순환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는 모방과 변형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전혀 새로운 형질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장기로 하는 일본인 특유의 국민성이다. 문호개방 후 산업사회를 추구하던 메이지 시대 초엽부터 그들은 서구문물을 들여다가 오직 모방과 변형으로 자신의 풍토에 알맞도록 개조하여 마침내 그 원본을 창조한 서구 열강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야구도 근본은 모방하되 일본인 취향에 맞게끔 오밀조밀한 기술을 고안하여 이를 적절하게 가미해서 잔재미가 넘치는 동양적 야구로 살짝 변형해 놓았다.

셋째는 타 종목에 앞서서 일찍 프로화한 점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30년대 중반 무렵에는 현대 스포츠가 모두 일본에 들어와 있었지만 프로화 된 종목은 복싱뿐이었다. 이런 프로 스포츠 불모시대에 탄생하였지만 전시 하에서도 프로야구는 용케 버티어 냈고 전후 혼란기에는 재빨리 부활하여 경제도약기에 접어들면서 프로야구는 일약 여가 선용의 총아로 떠오르게 되었다. 어느 종목보다 짜릿한 재미와 극적 장면을 많이 보여 주는 프로야구는 극히 자연스럽게 최고 인기스포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2. 고교야구의 상징 코오시엔甲子園

일본 프로야구 성장의 토대이자 원동력인 고교야구는 우리에게 갑자원이란 말로 익숙하다. 일본의 고교야구팀 수는 99년 통계로 4200여 팀에 달하고 등록된 선수 수는 약 15만 명에 이른다. 코오시엔이라는 것은 오오사카大阪에 소재한 한

신코오시엔阪神甲子園 구장에서 전국 규모의 대회가 열리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대회의 공식 명칭은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선발고교야구대회이다. 전자는 78월중에 벌어지는 관계로여름코오시엔甲子園이라 부르고, 후자는 34월중에 열려봄코오시엔甲子園또는센바츠選拔라 부른다.

대회방식은 전국 49개 지구에서 지역대회를 거친 최정예 팀이 참가한다. 홋카이도北海道 10개 지역의 추계대회에서 선발된 36개교가 다음해 봄에 코오시엔에 모여 결전을 치르는 방식이다. 흔히 일본의 고교야구선수들의 목표는 '코오시엔' 땅을 밟아 보는 것. 따라서 3년 내내 코오시엔 그림자도 밟아보지 못한 선수들이 허다한 실정이다. 고교선수들에 있어 코오시엔 무대는 바로 '꿈의 무대'인 셈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일단 코오시엔 무대에 서면 언론이며 각 프로팀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프로선수 프로필에도 일단 코오시엔 출장 경험 유무가 중요한 경력으로 등재된다. 코오시엔 출전 자체가 중요한 경력일진대 그 무대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면 '코오시엔의 영원한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프로 진출 시 상당한 몸값을 보장받는다.

3.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

일본의 야구의 역사는 대략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 야구가 처음 보급된 것은 1870년 호레이스 윌슨이라는 미국인에 의해서이다. 그 뒤 1913년 시카고 화이트 삭스와 뉴욕 자이언츠 팀이 일본대학팀과 3차례 시범경기를 벌였고, 1922년 이미 일본 최초의 프로팀인 NUK(일본체육협회)가 창단 되었으나 별다른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1934년 일본프로야구 초대 커미셔너인 쇼리키 마츠타로正力松太郎가 사주로 있던 요미우리신문사는 MLB(미국 메이저리그) 혼성팀을 초청하여 친선경기를 벌였는데, 이 경기서 일본팀의 사와무라 에이지沢村栄治투수(당시 고교생)는 이들을 철저히 농락하여 9탈삼진을 뽑아냈으나 루게릭에게 홈런을 맞아 10으로 패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에 프로야구가 공식 출범한 것은 1936. 두해전인 1934 大日本東京野球倶楽部(토오쿄오 쿄진군東京巨人軍: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설립을 시작으로, 1935大阪野球倶楽部(오오사까 타이가스大阪タイガース:한신 타이거즈이 설립되었으며, 1936년에日本職業野球連盟이 설립되고,大日本野球連盟名古屋協会(나고야군名古屋軍:주니치 드래곤즈)「東京野球協会」(토오쿄오 세네타스東京セネタース)「名古屋野球倶楽部」(나고야 킨코군名古屋金鯱軍)「大阪阪急野球協会」(한큐우군阪急軍:오릭스 블루웨이브)「大日本野球連盟東京協会」(다이토오쿄오군大東京軍 7팀이 현재와 같은 페넌트 레이스를 펼쳤다.

직업야구가 출범한 후부터 9년 뒤인 1944, 일본 군부의 프로야구 중지 명령과 함께, 사와무라沢村 선수를 비롯하여 많은 선수들이 군의 소집을 받아 전선에 배치되어 전사하는 등, 일본에서의 프로야구는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1945 8 15, 일본의 패전한 후 10년 전 프로야구 출범 당시에도 중심적 역할을 했던 요미우리 신문사주인 쇼리키 마츠타로正力松太郎와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같은 해 11 23, 진구우神宮 구장에서 프로야구 부활 제1회 동서대항 경기를 열었다. 1949년 시즌이 마감되자 본격적인 프로야구는 분리작업에 들어가고, 양 리그제를 결성하면서 명칭도 직업야구에서 프로야구로 바꾸었다. , 오늘날과 같은 양대 리그는 1950년에 발족한 것이다. 요미우리를 위시하여 쇼오치쿠츄우니치한신타이요니혼햄쿠테츠히로시마 등이 소속된 센트럴리그(CL)와 마이니치난카이토오큐우니시테츠타이에이긴테츠한큐 등 이 소속된 퍼시픽리그(PL)가 그것이다. 이에 1950년부터 양대 리그 챔피언이 MLB(미국 메이저리그)처럼 재팬시리즈(JS)를 벌여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후 각 팀들의 열띤 경기와 야구팬들의 뜨거운 호응으로 일본의 프로야구는 명실 공히 일본 최고의 프로 스포츠로 자리 잡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4. 일본 프로야구 시스템

리그

일본야구는 센트럴리그(6개 구단) 와 퍼시픽리그 (6개 구단) 2리그로 구성되어있다.

각 리그에서 우승한 팀이 일본시리즈를 열어서 그 해의 일본 챔피언을 가린다.

센트럴리그는 퍼시픽리그보다 더 열광적이며 유명한 팀들이 많다. 또한 센트럴리그는 팬들이 많다. 그래서 야구장이 언제나 꽉꽉 찬다. 반면에 퍼시픽리그는 센트럴리그보다 팬들이 적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구장이 한산하다. 또한 관중이 많고 적음에 따라 구단 수입에도 차이가 나서 같은 레벨의 선수라도 센트럴리그의 선수들의 연봉이 높다.

센트럴리그

구단명 연고지역 본거지구장 수용인원 평균관객수
요미우리자이언츠 東京 東京 45,600 39,626
야쿠르트스왈로즈 東京 明治神宮野球場 37,933 18,019
요코하마베이스타즈 神奈川県 요코하마스타지움 30,730 15,158
츄우니치드라곤즈 愛知県 나고야돔 38,414 32,859
한신타이거즈 大阪府兵庫県 甲子園球場 50,454 43,218
히로시마카프 広島県 広島市民球場 31,984 13,829

퍼시픽리그

구단명 연고지역 본거지구장 수용인원 평균관객수
니혼햄파이터즈 北海道 札幌 43,473 23,581
라쿠텐골던이글즈 宮城県 宮城球場 23,000 13,996
세이부라이온즈 埼玉県 西武 35,879 17,597
오릭스버펄로즈 大阪府 大阪 36,477 20,445
兵庫県 神戸野球場 35,000
치바롯데마린즈 千葉県 마린스타지움 30,200 19,848
소프트뱅크호크스 福岡県 福岡 35,695 29,964

5. 일본 프로 야구의 상징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명과 암

자이언츠 중심의 구조

일본의 프로야구는 프로라고 불리지만, 실태는 다른 아마추어 스포츠와 같은 일본형 기업스포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너 기업에 의해 보유되어지는 구단이 기업 내의 일체감의 양성과 외부 선전효과를 기대하는 점에서 프로야구는 축구의 J리그를 제외한 타 경기의 리그와 본질적으로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프로야구는 한 가지 다른 스포츠리그와 크게 다른 부분이 있다. 다름 아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존재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모회사인 요미우리신문이나 니혼TV 등 요미우리 그룹의 전국적인 대량보도에 의해, 다른 구단과는 다른 차원의 인기를 누리어왔다. 1950년대 말기, 텔레비전에서 야구 중계가 본격화되자, 많은 프로야구 시합 중에서 니혼TV 계열의 자이언츠전만이 매일 전국 중계되는 시기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이 시기는 1951년부터 3년 연속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이 고도경제성장을 시작하던 1950년대에만 8번의 일본시리즈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1960년대 전반에 2번의 우승을 더 추가하고, 진정한 일본의 경제성장이 빛을 발하던 1965년부터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결국, 일본이 전후경제성장과 요미우리자이언츠의 활약상이 맞물려 시너지효과를 거

두어, 일본인의 약 8할이 자이언츠 팬이라고도 말해질 만큼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특히 최근까지도 야구중계가 자이언츠전 밖에 방영되지 않는 지방도 많았고, 좋아하는 구단을 말해라면 거의 100가 자이언츠라고 할 정도로 팬이 편중되었다.

이런 구조에 의해, 프로야구는 극단적인 자이언츠 중심으로 운영되는 폐단도 있었으나, 다른 스포츠와는 비교도 되지 못할 정도로 대중이 야구를 접할 기회가 많아, 프로야구 구단을 보유하는 것에 의한 선전효과는 다른 스포츠에 비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엄청난 적자에 허덕이는 구단을 모회사가 지지하여, 현재도 역시 많은 신흥회사들이 프로야구 참가를 희망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자이언츠의 인기가 타구단의 경영도 지원하는 측면이 있어, 1990년대 중반까지는 안정되게 20 전후의 고시청율을 확보해 온 자이언츠전의 방영권료는 현재에도 한 시합 당 1억 엔이라고 말해지며, 센트럴리그의 각 구단은 매년 다액의 수익을 자이언츠전에서 얻고 있다. 이런 연유로 자이언츠전과의 경기 감소는 그 자체가 센트럴리그 타 구단의 경영을 압박하는 것이 되어, 2005년부터 시작된 센터럴퍼시픽리그 교류전이 2007년도에는 시합수가 삭감된 것은 이러한 사정에 의한 센트럴리그의 타 구단으로부터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프로야구 전체가 자이언츠에 과도하게 의존해 운영되기에, 자이언츠는 구계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는 FA제도나 드래프트 역지명 제도를 이용해, 풍부한 자금력으로 유력선수들을 독점하는 강력한 보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것이 리그 전체의 전력 불균형으로 이어지고, 자이언츠 나아가서는 프로야구 전체의 인기 저하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다.

자이언츠 인기의 저하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일본인 선수의 메이저리그에의 진출이 2000년대에 들어서 가속되고, 그전까지 국내 문제로만 해결되었던 일본프로야구의 존재가 커다란 전환국면을 맞이하였다. 한때 전력 집중화의 구도는 완전히 무너졌고, 사실 자이언츠는 2003년 이후 리그 우승조차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또 최근 인터넷이나 위성방송 등 미디어의 급속한 발달로 전국 어디에서나, 12구단 전 시합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의 시청도 가능하게 된 점, 또 퍼시픽리그 구단의 본거지 분산 및 지역 밀착형 경영에 힘입어 팬의 지지가 급속도로 다양화해져, 자이언츠 일변도에서 개인 기호에 따른 구단 선택하는 경향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요인에 의해 1990년대 후반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이언츠전의 시청률은 계속 하락해, 지상파 방송의 감소나 CM 수입의 감소는 계속되고 있다. 혹자는 최근 자이언츠전의 시청률이 저하된 것은 성적부진과 우승을 하지 못하는 이유이며, 자이언츠가 이기기 시작하면 시청률은 올라 갈 것이다 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2006 4월은 자이언츠가 개막 대시에 성공해 호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이언츠전의 월간 평균 시청률이 12.6%, 1989년 데이터를 취합한 이후 최저 기록을 경신했다. 즉 이겨도 시청률이 오르지 않는 심각한 인기저하 상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2007년 시즌은 니혼TV가 자이언츠전 중계의 대폭 삭감(위성방송으로 이전)을 결정했고, 이에 따른 고액의 방영권료 재검토 움직임이나, 미디어가 야구로부터 멀어짐에 의해 따른 인기 저하가 그대로 프로야구 전체의 침몰을 야기할 것이란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6. 데이터와 단체야구

일본의 야구 정보 분석력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분석은 다하는 게 일본야구라고 하겠다. 야구가 한 경기 끝날 때마다 생산하는 기록은 수백 가지인데, 이 기록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분석하고 도표화하며 앞으로의 경기를 전망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활약하다 일본으로 갔던 선수들이 자기도 모르는 버릇을 일본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투수의 버릇은 물론이고, 타자의 경우에도 분석은 필수적인 것으로, 특히 이승엽 선수가 홈런 신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날씨에 따른 홈런 지수를 데이터화해서 신문에 실린 적도 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데이터를 자료화해서 분석하고 또 그것을 활용하는, 즉 야구는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한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그리고 일본은 단체행동에 관해 대단히 엄격하며, 규율이 철저하다.

일본 프로야구를 다룬 영화 중에 Mr. Baseball 이란 미국영화가 있다. 뉴욕 양키즈의 스타선수 (Tom Selleck이 주연)가 팀의 루키와의 경쟁에 밀려 일본의 츄우니치드래곤즈에 트레이드되고 만다. 일본에서도 개인주의적인 경향 때문에 슬럼프에 빠지나, 일본 감독의 지도와 일본 여자 친구를 통한 일본 문화의 적응 후, 다시 자기 페이스를 찾고, 그러다 메이저리그의 한 구단이 그를 다시 발탁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일본의 야구를 대변하는 영화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즉 일

본 야구는 감독과 단체행동에 의한 야구라는 것이다. 개성이 강한 선수일지라도 개인적인 생각에 의한 플레이는 할 수가 없다. 오직 감독의 지시에 의한 플레이를 요구한다. 실제로 이종범 선수가 팀에 적응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경기 중에 감독이 작전을 너무 많이 걸고, 감독의 지시에만 따르는 수동적인 자세를 요구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이종범 선수 특유의 개인적인 센스를 전혀 발휘할 수 없게 되어 성적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본야구를 감독의 야구라는 말까지 나온다. 미국의 메이저리그는 팀이 선수 중심의 선수의 개인적인 생각을 존중해주는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7. 취소된 홈런

2006 6 11, 롯데와의 교류전에서 이승엽 선수의 홈런이 취소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3회 초, 2 1-1의 동점 장면에서 오제키 타츠야小関竜也 1루에 두고, 이승엽이 와타나베 슌스케渡辺俊介 투수로부터 우중간 홈런을 쳐 역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주자와 타자가 들어오고 난 뒤, 이마에 토시아끼今江敏晃 3루수가, ‘1루 주자 오제키小関 3루를 돌 때, 3루 베이스를 밟지 않고 돌았다고 주장, 니시모토 킨지西本欣司 3루심이 이를 받아들여 오제키선수는 아웃이 되었다. (일본 야구규칙 7.10) 홈에 생환하기 전에 3아웃이 되었기 때문에 이승엽 선수의 득점은 인정되지 않고, 싱글

히트로 기록되었다. (일본 야구규칙 7.12) 홈런을 친 선수가 베이스를 밟지 않아 아웃이 된 경우는 있었지만, 주자가 베이스를 밟지 않아 싱글 히트가 된 경우는 프로야구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라 타츠노리原辰徳감독은 이 판정에 대해 항의를 했지만, 니시모토 3루심이 밟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이 있다라는 말에 더 이상 항의를 하지 않았다.

다음날, 자이언츠는 해당 장면의 비디오테이프(방송국의 촬영영상)를 공개하고, 판정은 오심이었다며 영상을 DVD에 담아, 센트럴 야구연맹에 제소를 하였다.

6 19일 연맹으로부터 심판의 판단에 따른 판정은 최종적이다(일본 야구규칙 9.02(a)) 라는 점과, 야구규칙에 영상판정의 규정이 없기 때문에 검정 결과를 논평할 수가 없다란 회답이 돌아왔다. 즉 오심인가 아닌가에 대한 코멘트는 회피한 회답이었다. 영상으로 확인한 바, 해당 판정이 다를 수도 있는 것은 유감이지만 사실 이긴 하지만, ‘야구는 육안에 의해 판정되는 경기이고, 그 원칙은 지켜져야만 한다, 그래서 비디오 판정의 도입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구단은 다시 항의서를 제출했고, 똑같은 회답이 회신되어, 그 이상의 항의는 보류되었다.

한편.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지, 2007년부터 시범경기에서 홈런에 한해서 비디오 판정을 도입하기로 결정되었다.